이도희"의 HVAC 이야기"입니다.         방명록    질문/답변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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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이야기 - 동남아

1976년 봄이었습니다.   경원기계(세기) 내리 공장에서 공냉과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패키지 에어컨과 팬코일 생산에 여념이 없었는데, 원종기 사장님께서 일본 히타치 공장에 약 3개월간 코스로 연수를 갔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전에도 그런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아버지가 옛날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신원조회가 떨어지지 않아, 여권이 나오지 않았고, 당시만 해도 해외 나가기가 하늘에 별따기 보다 어려운 시절이라 포기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계속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신원조회가 왜 안나오는지 적극적으로 캐 보기로 했습니다.

회사 총무부에서 외무부에 여권신청을 하면, 외무부에서 치안본부로 신원조회를 하고, 가족 중에 연좌제에 걸리는 사람이 있으면, 중앙정보부로 또 정밀 신원 조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총무부 직원이 알 수 있는 결과는 외무부로부터 신원조회 결과가 "중통 (중앙정보부 통보) "으로 떨어졌다는 사실과, "중통" 이면 여권이 안 나온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출장 불가 결정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추적을 해보니, "중통"이라도,  중앙정보부에서 "적 (適)"으로 떨어지면, 여권발급을 받을 수 있었는데, 내 경우는 "적"으로 떨어지는 경우였습니다.  서둘러 총무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여권 발급 신청을 다시 할 것을 부탁하여, 소양교육을 받은 후 처음으로 단수 여권을 받는데 성공했었습니다.      당시는 출국자는 반공연맹 등 기관에서 실시하는 소양교육을 받고, 교육필증을 제출해야 여권이 나오는 때였습니다.     해외에서 북한 대사관이나 영사관 근체에 얼씬도 하지 말고, 혹시 이상한 전화를 받거나 수상한 사람이 수작을 부려도 얼른 그 자리를 피해라, 욕실 바닥에서 샤워를 하지 말라, 양식은 이렇게 먹어라, 침 뱉지 마라, 등 주로 반공 교육과 일반 예절 교육이었는데, 세종로 시민회관 근처, 장충동 반공연맹, 강남 구청 근처 반공기관 등 교육 장소를 찾아 한 동안 지겹게 들어야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 어렵고 귀한 여권이 나와, 드디어 이실구 부장, 박용수 대리, 최평규 기사와 함께 일본 연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떠나기 이틀 전에 히타치의 국제영업부 직원인 기따무라가 출장 와서 사장님께 말씀드리기를, 히타치 홍콩 대리점에서 AHU와 FCU를 수입하고자 하는데, 히타치 제품은 좀 비싸니 경원에서 수출하려면 해보라고 했고, 사장님은 마침 여권이 나와 있었고, 출장 준비가 되어있는 나에게 일본 가는 길에 홍콩에 들러 수출 상담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젊은 나이에 두려울 것이 없던 때라, 사장님 말씀대로 하겠다고 아뢰고, Cathay Pacific 항공으로 난생 처음 홍콩 출장길에 올랐습니다.  당시 김용주 공장장님께서 지금의 국내선 청사인 김포국제공항에 나오셔서 출국 수속을 도와주셨고, 탑승카드는 양복 왼 쪽 윗 주머니에 꽂아 주시던 자상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틈틈이 영어공부는 하고 있었지만, spoken English는 접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때라, 영국 계통의 파란 눈의 스튜어디스가 빠른 말씨로, "Would you like chicken or beaf?"라고 하는 말을 영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른 답을 못하니 답답했는지, 영어 못한다고 경멸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럭저럭 눈칫밥 기내식 한 끼 얻어먹고 대만에 들렸다가 홍콩 카이탁 공항에 도착하니 저녁이 되어 어두웠습니다.  그 때만 해도 홍콩 직항은 없었고, 반드시 대만의 장개석 공항에 들었다 가는 코스가 전부였기 때문에 홍콩 가는데도 이럭 저럭 여섯 시간 정도는 잡아야 할 때였습니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짐을 기다리는 데, 며칠 전에 아내가 남대문 시장에서 어렵게 사와서 꾸린 Tourist란  중형 가방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첫 해외나들이에 모든 것이 생소한 나에게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찾아 주겠다는 항공사 직원의 말을 못 믿어하며, 일단 택시를 잡아 예약 해둔 Furama호텔로 갔습니다.  홍콩 섬의 Wanchai에 있는 그 호텔은 얼마나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는지...    당시는 출장비로 하루 $70을 지급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먹고 자고 교통비까지 써야하는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고급스러운 호텔은 여간 부담스러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미리 연락을 해 둔 바이아인 Standard Refrigeration & Air Conditioning, Co., Ltd. 란 곳에서 예약을 해둔 호텔이었기 때문에 덕분에 처음부터 간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가방은 중동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그 다음날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Standard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우리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광동 사람들이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별로 불편이 없었으나, 한 나라에서 영어와 광동어 두 가지 말을 쓰고 있어 여간 신기하지 않았습니다.   광동어는 중국말 중에서 심한 사투리인데, 한문으로 어느 정도의 필담이 가능한 정도지 전혀 도움이 안 되었고, 스튜어디스와 이미 어려운 영어소통을 한 후라 Standard의 엔지니어들과 소통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분들이 참고로 할 카탈로그 등 자료를 달라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수출용으로 만들어 놓은 자료가 전무한 때라, 자료 없이 우선 대충 견적만 할 수밖에 없었는데, 공장에서 생산에만 전념하던 때라 수출 준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날아갔기 때문에, 부산에서 홍콩까지 콘테이너 운임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대뜸 Yellow Page에서 船社를 찾아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신통하게도 통하더군요.  전화 받은 사람도 끝까지 친절하게 다 알려 주었습니다.     이 때 Standard사에서 만난 Mr. Lam은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지만 평생 친구가 되었고, Mr. Seung도 그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한 동안 서로 소식을 전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일 주일 동안 머물면서 수출 가능성을 확인하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Roland Lam -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다)                (Furama Hotel에서 바라 본 당시의 Kowloon.
                                                                                     (참고: 지금 (2009) 이 자리에는 섬 뒷 산 만큼 높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네다 공항에는 코스모 무역의 우메무라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코스모 무역은 히타치 對韓 수출 창구 회사로 그 들에게는 나도 바이아의 한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우메무라는  무역 회사 직원이라 영어도 당시 나보다는 잘하는 것 같았으나, 영어보다 주로 일본어로 이야기를 했고, 그 동안 틈틈이 공부해온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이 친구 "빅구리 시마시다"라고 하며 놀란 척 하였습니다.    신깐선을 같이 타고 시즈오까켄의 시미즈 (淸水)라는 도시에 있는 히타치 공장까지 안내를 해 주어, 일본에서는 처음부터가 별로 생소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일본어 실력은 그 때를 정점으로 퇴보 일로에 있습니다.   첫째로 영어를 더 써야했기 때문에 일본어는 별로 쓸 일이 없었고, 일본 사람과의 대화도 내가 영어를 쓰면 높게 평가를 받았고, 일본어를 쓰면 얕보인다는 나름대로의 느낌이 있었고, 둘째로 일본어는 부산 사투리가 50음으로 변한 원시언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냉동 공조 전반에 걸친 3개월간의 연수 과정은 처음에는 영어로 시작하더니, 슬금 금 일본어가 섞기는 것이었습니다.   교재도 영어 일본어 반반이었습니다.     공장의 생산과정은 절대로 안보여 주었으나, 우겨서 딱 한번 본적이 있었습니다.  후지료라 불리는 숙소에서 공장의 강의실까지 걸어서 왔다 갔다 하는 단조로운 교육과정이었고, 가끔 단체로 현장 방문 나가는 단조로운 일과의 계속이었습니다.    날씨는 초여름이고 비가 자주와 습도가 높아 끈적끈적했으나 해변이라 공기는 맑았고 사람들은 너무 예의바르고 친절하여 질투가 날 정도였습니다.
  
 (강의실)


필림을 사고 현상을 맡기고 하는 조그만 상점이 있었는데, 그 집 사람들과 단번에 친하게 되어, 모두 초청을 받아 근사한 저녁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 받고 --)                                             (주인 아줌마)


후지료 앞에는 매우 젊은 여자 한 분이 운영하는 까페가 있어, 몇 번 들렀으나 , 수작을 부릴 수 있는 형편도 못되었고, 성인 영화관이 있었으나 그 것도 한두 번 보고나니 재미가 없어, 그 곳 생활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했는지,  이실구 부장이 어느 주말에 동경 갔다오겠다고 하며 사라져 버려 본사와 코스모 무역이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박정희 군사 정권 때라 대북 관계가 너무 엄격할 때였는데, 일본서 한 사람이 증발했으니, 조총련에 납치당했을 가능성도 있어 이건 국가적으로 큰 일이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표로 요코하마의 영사관과 코스모 무역으로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며칠 뒤에 이실구 부장은 무사히 돌아왔는데, 태연히 "며칠 구경 좀하고 바람 좀 쉬고 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 큰 배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확실히는 모르나 귀국과 동시에 남산으로 연행되어 상당히 고초를 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수를 받으면서도, 홍콩에 벌린 수출 문제에 골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품이야 공장에서 만들면 되는데, 카탈로그 등 자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같이 간 박용수와 최평규의 의견을 틈틈이 들어, 우선 일본 자료를 기초로 하여 나름대로의 각종 자료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냉동공조 Instructor 자격증이 수여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니, 회사에서는 대뜸 무역부에 수출과를 만들어 놓고는 혼자서 수출을 전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조기 제품 수출 부서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대기업에서는 냉동공조에 손을 대지 않았을 때라, 메이커로는 경원(세기), 범양 (승전사)과 아주 작은 몇몇 공장들뿐이었는데, 다른데서는 수출에 눈을 돌릴 여력이 없을 때였습니다.

어렵고도 보람찬 일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자료가 없으면 히타치 자료를 베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비싼, IBM 볼 타자기 구입을 사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쾌히 결재를 하셨습니다.  당시 타자기는 헝겊으로 된 리본을 글자쇠가 쳐서 종이에 글자를 치는 장치였는데, 글씨가 깨끗하지 않았고, 오타가 나면, 화이트로 지웠기 때문에 문서를 치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기술 자료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많을 때였습니다. IBM 볼 타자기는 비닐 리본에 글자가 새겨진 볼이 돌아가면서 원하는 글자를 치는 혁기적인 기계로 글씨체가 오프셑 인쇄처럼 깨끗했고, 오타가 나도, 지움 장치가 있어, 방금 친 글자를 송두리째 뜯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타자기로 기술 자료를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수출 카탈로그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여직원 김경희는 타이핑이 매우 빨라 웬만한 임시 자료는 쉽게 타이핑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패키지, 팬코일, AHU, Rooftop 에어컨, Split 에어컨, 쿨링타워 등 영어판 카탈로그를 만들었는데, 자료는 히타치 것을 참조하였고, 모양은 캐리어 것을 참조하여, 2색으로 옵셋인쇄로 만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출장도 자주 나가고, 바이어도 불러들이며, 해외 전시회에도 출품하는 등 본격적인 수출활동을 1983년 중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내 생애에서 그 때가 가장 열심히 일했던 때였습니다.  밤낮이 없었으니까요.

당시 만 해도, 외화가 없고 가난했던 때라, 여권은 거의 모두가 단수 여권이었습니다.   단수 여권은 해외에 한번 갔다 오면 못쓰게 되어, 또 다시 신원조회를 거치고, 소양교육을 받은 후 발급 신청을 하면, 약 15-20일 만에 발급을 받을 수 있는 때였습니다.  

여러 번 쓸 수 있는 복수 여권은 수출입 실적이 많은 회사의 대표들에게만 발급되면 때였습니다. 회사 직원이 복수 여권을 소지하기는 매우 어려운 때였습니다.     홍콩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소량이나마 AHU와 FCU의 주문을 받게 되었고, 국내 시장 위주의 공장 틈바구니에서 어렵게 수출 제품을 만들어야 하니, 생산부의 긴밀한 협조가 없으면 안 되었고, 실제로 공장에서 오래 근무했던 관계로 생산부와의 협조도 원만했으나, 워낙 뒤떨어진 품질을 국제 수준으로 단번에 올리기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최초로 받은 여권과 같은 모양의 단수 여권.

재 발급 받을 때, 외무부에서 구 여권을 회수했으므로, 최초의 여권은 지금 보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79년에야 일반일들에게 복수여권이 발급되기 시작했습니다.

 

 

1979. 12. 19 에 처음으로 받은 복수 여권.
수출 실적이 많은 상사 직원에게만 발급.
직원으로서는 사내에 유일한 복수여권

 

여행할 수 있는 나라를 외무부에서 기재했고, 기재가 안 된 나라는 여행을 할 수 없었다.   목적지를 추가할 때 마다 현지 공관에서 여행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그 당시 공관직원들의 불친절과 뻤뻣함이란.

한번은 홍콩의 Standard사로부터 Queen Elizabeth Indoor Stadium에 설치된 AHU에 문제가 많으니 급히 사람을 보내라는 텔렉스가 왔습니다.  당시는 FAX 나 E-mail이 없을 때였고, 국제통화는 교환원을 거쳐서 한참 만에 통할 수 있던 때라 국제 통신은 텔렉스가 전부였던 때였습니다.    여권이 있는 x 씨를 내 보냈습니다.   처음 출장이고 아직 영어에 서툴러 걱정은 되었으나, 부닥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좋은 경험 쌓으라고 격려하며 보냈습니다.    가보니 옥상에 설치된 대형 AHU에서는 비만 오면 물이 스며들고, 내부의 절연재는 저절로 떨어지며, 진동과 소음이 심하다는 등 당시의 우리 품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설치 업자가 농담으로 x씨를 협박을 했던 모양입니다.  

"당신 이것 말끔히 고쳐 놓지 않으면 재미없어 해",  
"못 돌아가 해" 하고.  

 Standard의 협조를 얻어 최선을 다 했으나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했던 모양이었습니다.   말은 잘 안통하지요, 본사는 땅 끝처럼 멀리 있지요.   이 세상에 혼자 떨어져 역경에 부딪쳤는데 이 난간을 어떻게 극복하나, 고민하다가, 어느 날 저녁 호텔로 돌아오면서 중대 결심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과실과 과일 칼을 사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좋다, 내 죽으면 될 것 아닌가 생각하고, 처음엔 넥타이로 목을 매었습니다.   넥타이가 끊어지며 눈알만 튀어 나오고 자살이 미수에 그치자, 과일 칼로 자기 목을 찔렀습니다.    

Standard사 사장 Mr. Fu 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사람이 지금 Queen Elizabeth 병원에 있는데 생명이 위독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오호 통재라.   마침 해외 출장을 다녀 온지 얼마 안 된 나는 아직 신규 여권을 발급 받지 못한 때였습니다.  마음은 급하나 갈 수가 있어야지요.   국제적으로 이런 망신이 있나.   Standard사에 선처를 부탁하고, 급히 신청한 새 여권을 보름 만에 받아들고 날아갔더니, x씨 는 마침 퇴원을 하여 목에 붕대를 매고 있었으나 정신은 많이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Queen Elizabeth 병원은 영국계 병원인데, 간호원 한 분이 x씨를 극진히 보살피고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x씨 는 내가 추천한 무역회사로 자리를 옮겼고, 그 회사에서 매우 열심히 일을 잘 했습니다.   지금은 자영업을 하고 있는데, 사건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매우 건전한 정신을 가진 훌륭한 사람으로, 독창적인 제품을 만들고 있고, 코리아 헤럴드를 구독하고 있으며, 바둑 실력 3급 정도의 표준 시민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있지 못하고 혼자서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 사건은 극명하게 알려 줍니다.

홍콩을 시작으로 동남아 수출을 본격화 했고, 어디를 가든지 대개 홍콩을 경유했으며, York 일로도 최근 까지 홍콩을 자주 가게 된 데다가,  끔찍한 에피소드도 간직한 곳으로 나와 매우 가까운 곳으로 남아있습니다.

홍콩에 이어 싱가포르 두 번째로 자주 찾게 됩니다.    그 해 히타치가 동남아 대리점 회의를 싱가포르에서 열었는데, 회장님과 같이 참석을 했습니다.   히타치의 국제영업 부장 Lucas란 분이 주재하는 회의였는데, 참석자 모두의 자기소개를 하고 영업현황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미리 준비를 못했다가 즉석에서 횡설수설하느라 땀을 뺀 기억이 납니다.   회의장이고 투숙한 호텔은 Shangrila란 호텔이었는데, 약간 높은 지대의 아늑한 분위기에 위치한 매우 고급호텔이었습니다.  Sidney Sheldon의 소설 Rage of Angel 에 주인공이 머문 이 호텔 이야기가 자세히 나옵니다.   머물었던 시기도 거의 같은 시기였고, 싱가포르 이야기 거리로 등장하는 Boogy Street의 여장남자들의 이야기도 많이 공감하는 장면입니다.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부르나이, 말레지아, 인도네시아, 필립핀, 태국 등지로 수출을 넓히기 위하여 이듬해인 1977년에 힐턴호텔 콘벤션 센터에서 열린 공조기 전시회에 에어컨 몇 점과 공기압축기를 출품을 하였습니다.  
  
 (전시회에 출품한 에어콤프레서)


 먼저 간 나는 Phenix호텔이라는 비즈니스호텔에 여장을 풀었고, 다음 날 도착하신 원종기 사장님은 인근 힐턴 호텔에 방을 잡아 드리고 방까지 안내를 해 드렸습니다.    "호텔이 왜 이리 좋노.  비싸겠는데, 이 과장 있는 호텔에 같이 있으면 안 되겠나"  "제가 있는 호텔은 비즈니스호텔로 좀 어수선하고 분위기가 안 좋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이 호텔에 계십시오" .    여장을 푼 후 사장님께서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해서, 오랜만에 좀 분위기 잡고 잘 먹게 되어 내심 반가웠는데, 사장님께서 제의 하신 곳은 포장마차 같은 Car park 식당이었습니다.  낮에는 주차장이고 밤에는 식당으로 활용하는 곳이었지요.     그러나 열대 지방이라 위생 시설은 철저하였고,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메뉴로가 많았으나, 사장님의 검소함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0년대 초 한일간 무역교역이 처음으로 시작되면서, 재빠르게 히타치와 제휴하여, 사업 기반을 다진 분이었는데, 에어컨 사업에도 크게 성공하고 있었고,  앞날도 매우 밝았는데,  몸에 밴 검소함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에어컨 설치 문제로 이태원에 있는 사장님 댁에 간적이 있었는데, 저녁때가 되어 사모님이 저녁을 차려주는데, 식단은 밥에 간단한 시레기국, 김치, 밑반찬 정도였습니다.    좀 즞게 사장님께서 귀가하였습니다.    사모님: "저녁 식사 하셨어요?"   사장님: "묵긴 오디서 묵어, 밥 차려 주거라" 해서 저녁  식사를 하시는 걸 봤는데, 식단은 조금 전에 우리가 받은 식단과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장님 께서는 79년 49세를 일기로 간 질환으로 별세하셨는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나를 유별나게 아끼신 분이었는데.     돌아가기 직전까지 간병으로 초췌해진 사모님을 보고, "당신 얼굴이 왜 그렇노.  나는 괜찮아. 내 걱정 말고 당신 좀 잘 묵어야 되겠구만" 하신 분이었습니다.

전시는 나흘 간 했는데, 반응이 좋았고, 많은 바이어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LK Tan과 Antony Chia는 아직 까지도 가까운 친구로 남아있습니다.  
 
 (Anthony Chia)                           (忙中閑:  鄧麗君노래를 부르는 가수)

Fiberglass 닥트 설치를 주업으로 하는 Antony와는 그 뒤로도 자주 만나 싱가포르 구석구석을 같이 많이 싸질러 다녔습니다.    서울에  바이어도 많이 데려 왔고요.  싱가포르 영어는 영국 영어인데, 중국 발음과 어순, 말레지아 말씨가 가미된 독특한 영어로 홍콩의 홍글리시와 비슷한 싱글리시입니다.  친구들 끼리 왁짜지끌 떠드는 걸 보면, 이게 영어인지 중국말인지 구분이 힘들고, 실제로 영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쓰기도 합니다.  "오늘은 필요 없어"는 "Today no need"이고, 땅을 파는 것은 "dig dig"라고 합니다.     그냥 "Thank you"하면 될 것을 "Thank you, 러" 라고 합니다. "러"는중국어에서 따온 말로 어순을 마감짖는 말로 (了) 약간의 과거형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Okay라고 하면 될 것은 "Okay라" 고 합니다.  
 ("라"는  말레지아에서 따왔다는 것이 90년대 초에 만난 말레지아 중국인 Kam Leong의 설명이었습니다. Kam Leong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수입 편에서 언급할 것인데, 나의 원수였으나, 나를 IMF에서 미리 해방시켜주어 결과적으로 은인이 되기도 한 사람입니다.)

  (싱가포르 공원에서 포착한 내 작품)

그러나 공용어는 험 잡을 데가 없는 깨끗한 영국영어이고, 사회 곳곳에 옛날 머문 영국의 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정치를 잘하여 섬 전체가 완전히 공원 같은 나라입니다.     뇌물은 상상도 할 수 없고, 공무원에게 점심 한 끼라도 사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당시에 유일하고 합법적인 뇌물 공여는 해외로 데리고 나가 접대하는 것입니다.   공무원은 정부 규정에 의하여 수입할 물품을 사전에 검수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 업자들이 이를 활용하는 것이지요.   해외에 나가서 그 쪽 사람들이 식사 같이 하자는데, "싱가포르 법이 업자와 식사 같이 못 하게해서 같이 못하겠습니다"라고 해서는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Chia를 통하여, 설비 담당 공무원과도 친하게 되었고, 특히나 설비 설계하는 Consultants 사람들 모두와 매우 절친하게 됩니다.   실제로 세기 제품을 설계에 많이 반영도 시켰습니다.  물론 이 분들이 서울에 오면 극진히 대접하여 보냅니다.   그 때만해도 흔하던 요정을 많이 이용했지요.    싱가포르서 한 번 식사 같이하고, 서울 요정에서 한번 식사하고 나면 대개는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고 맙니다.

 (내방한 손님 들)

라다크리스난은 인도계통 사람으로 설비관련 부서 공무원이었는데, 에어컨 및 가전제품 생산회사인 ACMA로 옮겼던 사람으로 나와 친하게 지냈고, BESCON의 CK HEE는 설계회사를 하고 있었는데, 80년 대 초에 요절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달려가서 조문할 거리도 아니어 조전만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해서 동남아 각국 바이어들과도 각별하게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말레지아의 CHIN KEE TONG과는 쿠아라룸풀과 이포를 오가면 AIR COMPRESSOR 수출 건으로 교분을 쌓았고, 브르나이의 C.Y. Yong과도 많은 거래는 많지 않았지만 친하게 지냈고, 자카르타의 LANGENG SOEGIARTO와도 친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CHIN KEE TONG의 Ipoh 사무실에서 상담 후 한잔하자고 해서 시작한 술이 몇 차를 지나는지 완전히 필름이 끊어졌던 기억과, 뒷날 경비행기로 둘이 Penang에 갔는데, 뒷날 점심 때 까지 토할 것 같은 거북함으로 고역을 치룬 일,  한번은 Lanseng 사무실을 찾았을 때가, 하필 그 나라 명절 전날이라 현찰을 대봉투에 나누어 담아, 관계 요로 부서 공무원들에게 명절 선물로 돌리는 일을 도왔던 일 (그 때 우리나라도 똑 같았음) 등이 생각납니다.

상대했던 동남아 사람들의 대 부분은 (필리핀 빼고) 화교였는데, 각자의 중국어 사투리 (광동어와 학까가 많이 쓰임) 외에, 표준어인 북경말 (국어라 함)을 대개는 구사하기 때문에, 이 들과 보다 친밀하게 지내기 위하여, 송재록 선생님의 중국어 방송교육을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었습니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중국어는 특히 무조건 문장을 외워야 합니다.  한자는 이미 상당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법은 따질 필요가 없고, 사성으로 무조건 문장 외우기에 매달렸습니다.    송재록 선생께서는 간자를 안 쓰셨기 때문에, 간자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94년 단체 여행으로 중국 곳곳을 방문했을 때, 이미 녹슬었지만 옛날 배운 중국어가 생각이 났고, 상당히 구사할 수가 있어, 중국이 전혀 낯설지 않아 옛날 익혔던 중국어가 매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2011.10  스마트폰에도 알맞게 고쳤습니다.

 -- 계속 --